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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李南珪)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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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원팔(元八)
호(號)수당(修堂)
생년1855(철종 6)
졸년1907(융희 1)
시대조선후기
본관한산(韓山)
활동분야의료 > 의료인
이호직(李浩稙)
청송심씨(淸松沈氏)
출신지서울
공훈건국훈장 국민장

[상세내용]

이남규(李南珪)
1855년(철종 6)∼1907년. 한말의 의사(義士).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원팔(元八), 호는 산좌(汕左)수당(修堂). 서울 출신. 이호직(李浩稙)의 맏아들이며, 모친은 청송심씨(淸松沈氏)이다.

1861년 허전(許傳)의 문하에 들어가 일찍이 유학으로 이름을 떨쳤다.

1875년(고종 1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883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올랐다.

1885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고, 그뒤 부수찬수찬을 역임하였다.

1893년 부호군을 지낸 뒤 1896년 안동부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98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내고, 1902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한편, 1894년 5월 일본공사 오도리(大鳥圭介)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입성하자 상소를 올려 일본의 무도함을 규탄할 것을 요구하였고, 갑오경장의 부당성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의 통분함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흥부사의 직을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1906년 병오의병 당시 홍주에서 거의하였던 민종식(閔宗植)이 일본군에 패하여 은신을 요구하자 숨겨 주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의병과 관련 있다 하여 1907년 공주옥에 투옥되었다가 며칠 뒤 온양 평촌 냇가에서 아들 이충구(李忠求)와 함께 피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晩修拙辭(李南珪)

[집필자]

이구용(李求鎔)
대표명이남규(李南珪)
남규(南珪)
성명이남규(李南珪)

명 : "남규(南珪)"에 대한 용례

전거용례
韓史綮v3論曰南珪一疏大扶倫常豈非朝鮮祖宗養士之力哉抑帝之不罪南珪所謂其顙有泚也詩云民之秉彝
韓史綮v3臣之體○中樞院議官李南珪以帝不臨大院君喪而爲魂殿非禮之擧上疏諫引魏徵諫唐太宗望昭陵之說以風之群臣皆爲南珪危之帝覽疏留中始閔后在時每有章疏帝與后共讀之見有鯁辭則動以逆賊目之而加罪至是帝老於世情又恐外人之譏議
韓史綮v3論曰南珪一疏大扶倫常豈非朝鮮祖宗養士之力哉抑帝之不罪南珪所謂其顙有泚也詩云民之秉彝
韓史綮v3宣力及宗植敗逃南珪又爲之藏匿于是其同郡人與南珪有隙者告日本人曰不除南珪忠淸無寧日日本人信之掩至將縛之南珪叱曰士大夫可殺不可辱吾非逃者何縛爲遂轎而出行至溫陽日本人拔劍刺殺之南珪南黨人能文章長於章疏在薦紳中聲
韓史綮v3○冬十一月日本置副統監于統監府以曾彌荒助爲副統監○初閔宗植之起義也李南珪在禮山鄕廬多有宣力及宗植敗逃南珪又爲之藏匿于是其同郡人與南珪有隙者告日本人曰不除南珪忠淸無寧日日本人信之掩至將縛之南珪叱曰士大夫可殺
韓史綮v3府以曾彌荒助爲副統監○初閔宗植之起義也李南珪在禮山鄕廬多有宣力及宗植敗逃南珪又爲之藏匿于是其同郡人與南珪有隙者告日本人曰不除南珪忠淸無寧日日本人信之掩至將縛之南珪叱曰士大夫可殺不可辱吾非逃者何縛爲遂轎而出
韓史綮v3閔宗植之起義也李南珪在禮山鄕廬多有宣力及宗植敗逃南珪又爲之藏匿于是其同郡人與南珪有隙者告日本人曰不除南珪忠淸無寧日日本人信之掩至將縛之南珪叱曰士大夫可殺不可辱吾非逃者何縛爲遂轎而出行至溫陽日本人拔劍刺殺之
韓史綮v3忠淸無寧日日本人信之掩至將縛之南珪叱曰士大夫可殺不可辱吾非逃者何縛爲遂轎而出行至溫陽日本人拔劍刺殺之南珪南黨人能文章長於章疏在薦紳中聲名次於李建昌○前參贊許蔿起義兵於朔寧徇畿內殺掠日本人嘗語人曰吾非謂吾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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